[한화실록] 종실열전 하주석전

 



<종실열전 하주석전>

- 주석의 성은 하씨로 정확한 본관을 알 수 없으며 한성부 사람이다. 호는 견(犬) 자는 후억(後抑)이다. 전투에서 뒤늦게 몸을 굽히는 일이 많아 후억이라 한다. 심성 또한 그러한지라 한화 백성들이 주석의 호를 따서 무릇 그를 개주석이라 부른다. 문장력이 뛰어나 시인으로도 활동하였으나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괴이하였으므로 그만두었다.

- 신일서원 입학 초년에 가장 뛰어난 실력을 보이며 주목받았으나 니미(你美)3년(2012) 한화에 등용되어 여러 차례 출전할 때마다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 혹사원년(2015) 폭군 세이군(勢離君)이 비가공(飛加公) 경학을 유격대장 자리에서 해임하고 계란적(鷄卵賊) 권모를 앉히는 기행을 일삼았다. 이에 젊은 장수 주석이 해마다 화포 군단 10부대씩을 양성해 바치니 세이군도 어쩔 수 없이 역적 권모를 처형하고 주석을 중용할 수밖에 없었다.

- 용덕원년(2018) 꾸준히 출전하였으나 4번 전투에 나가 겨우 1번 이기는 꼴이었다. 방어 능력이 일취월장하고 기병 역시 14기로 성장시켰으나 부족했다. 특히 보급 능력이 떨어져 지원군이 공격하기 전에 후억하여 전투를 그르치는 일이 잦았다.

- 때문에 주석을 탄핵하고 비가공 경학이나 다른 유망한 장수들을 기용해야 하며 책임자인 영의정 겸 병조판서 종훈 역시 물러나야 한다는 상소가 빗발쳤다. 그러나 대왕은 주석과 종훈을 두둔하는 정도로 그쳤으며 이에 주석은 갈주(葛主), 즉 칡의 주인으로 등극했다. 이후 큰 부상을 당하며 용덕 연간에는 제대로 활약하지 못했다.

- 배로원년(2021) 새 병조판서 화성돈(華盛頓)을 만나 보급 능력을 길렀다. 화포 10문과 기병 23기 역시 양성하였고, 한가운데만을 정확히 공략하며 한화 백성으로부터 정노하 세 장수만 있다면 국가 재건이 어렵지 않다는 평을 들었다.

- 이듬해 전투에서 패한 뒤 종종 칼과 창을 던지는 이상행동을 보였고 기어이 영의정 굴례만추(崛醴晩秋)에게 철모를 내던져 맞추었으나 반성하지 않았다. 이에 배로대왕이 죄를 물어 서산으로 유배보냈다. 복귀한 후 칠시(漆市)의 후군장 해영을 베는 등 맹활약하였다.



※ 사관은 논한다. 주석은 성품이 오락가락한 면이 있고 분노를 참지 못하여 적절치 못한 상황에서 자주 분출하였기에 세상 사람들의 미움을 샀다. 어찌 자신의 조부같은 연세의 사람을 폭행하고도 사과하지 않고 반성하는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는가? 또한 오만하여 타인의 조언을 잘 듣지 않았기에 신일서원 시절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이 지경에 이르렀다. 다만 방어하는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이었으되 보급을 통해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티는 능력이 낙제점이었다. 삼진(芟進), 즉 일루성(一壘城)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베어지니 한화의 공세가 약해지는 것은 어린아이도 앎이 당연하지 않은가.